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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신도 증거도 없는 연쇄살인, 『속삭이는 벽』 (프레드리크 빈테르, 문학동네)

11월 6일마다 반복되는 살인과 ‘나는 오소리다’ 원고, 북유럽 심리스릴러의 새로운 얼굴

한성욱2026년 2월 19일 오후 2:36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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속삭이는 벽.jpg출판사 제공

일 년에 단 하루, 11월 6일이 되면 누군가는 사라진다. 시신도 남지 않고, 결정적 증거도 없다. 스웨덴 예테보리를 공포에 빠뜨린 연쇄살인마 ‘오소리’는 오 년째 같은 방식으로 흔적을 지운다. 『속삭이는 벽』은 이 기묘한 사건을 중심에 놓고, 수사와 출판 현장을 교차시키며 전개되는 북유럽 심리스릴러다.

베테랑 경찰 세실리아는 오소리를 추적하지만, 사건 현장에 남는 것은 피해자가 어딘가로 끌려간 자리의 흙과 피의 자국뿐이다. “시신이 존재하지 않는 건 피해자가 존재하는 것보다 더 나빴다”는 문장은 이 소설의 공포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. 범죄는 있었지만 증거는 없다. 반복되는 11월 6일은 수사팀을 점점 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.

다른 한편에서 출판기획자 안니카는 파산 위기의 출판사를 살릴 원고를 찾다가, 사무실 앞에 놓인 진흙투성이 원고를 발견한다. 제목은 ‘나는 오소리다’. 아직 잡히지 않은 연쇄살인마의 고백처럼 읽히는 이 원고는 그녀에게 위기 탈출의 기회이자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동시에 안긴다. 원고 속 화자는 “나는 바닥을 뚫고 온다”고 선언하며 집이라는 가장 안전한 공간을 위협한다. 집 안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긁는 소리는, 안니카의 개인적 불안과 겹쳐지며 서서히 현실을 잠식한다.

소설은 세실리아의 수사, 안니카의 선택, 그리고 오소리의 1인칭 고백을 교차시키며 긴장을 쌓는다. 특히 매 장 도입부에 삽입되는 오소리의 글은 독자를 범인의 시선으로 끌어들인다. “오소리가 되기 전, 나는 대체로 남들과 비슷했다”는 고백은 악의 씨앗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일상 속 누군가에게도 잠들어 있을 수 있다는 섬뜩한 가능성을 드러낸다.

『속삭이는 벽』은 단순한 추적극을 넘어, 안전하다고 믿는 공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파고든다. 문을 잠그고 경보 장치를 설치해도, 바닥 아래에서 무언가가 다가온다면 그 공포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. 마지막 문장까지 독자를 붙잡는 이유는,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조작된 이야기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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