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시간을 듣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일, 『귀 씻는 은행나무』 (김화음, 한비CO)

자연과 일상의 언어로 삶을 천천히 비추는 서정 시집

장세환2026년 4월 8일 오후 12:45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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귀 씨는 은행나무.jpg출판사 제공

강가에 서 있는 나무 하나를 오래 바라본 적이 있는가. 바람이 지나가고, 사람들의 말이 흘러가고, 계절이 쌓이는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모든 시간을 듣고 있는 존재. 김화음의 시집 『귀 씻는 은행나무』는 그런 장면에서 시작되는 책이다. 빠르게 흔들리는 감정보다, 오래 머물며 쌓이는 시간을 따라가는 시선이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.

이 책은 시인의 첫 시집으로, 20년 동안 길어 올린 시편들을 묶은 결과물이다. 자연과 일상의 사물을 통해 인간의 시간과 기억을 바라보는 방식이 특징적이다. 나무, 강물, 바람, 길 같은 익숙한 풍경들이 시 안에서 다시 놓이며, 그 안에 머물던 삶의 흔적들이 조용히 드러난다.

시집은 다섯 개의 흐름으로 이어진다. 꽃과 계절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읽어내는 시선에서 시작해, 산사와 자연 속에서 그리움을 더듬고, 일상의 손끝과 체온으로 이어진 삶의 감각을 지나, 길 위에서의 시간과 마지막으로 바람이 닿는 자리까지 확장된다. 각각의 시편은 거창한 사건을 말하기보다, 사소한 장면을 오래 바라보며 의미를 길어 올리는 방식으로 완성된다.

표제작인 ‘귀 씻는 은행나무’는 이 시집의 정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. 금호강 둑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사람들의 말을 오래 듣고, 그 소리를 쌓아 두었다가 다시 흘려보내는 존재로 그려진다. 말들이 쌓이고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나무의 시선은 곧 시인의 태도와 겹친다. 빠르게 판단하거나 규정하지 않고, 시간을 들여 받아들이는 태도다.

김화음의 시는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.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고, 오래 들여다보며, 그 안에서 의미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기다린다. 격렬한 언어 대신 조용한 관찰을 택한 이 시집은, 읽는 이에게도 같은 속도를 요구한다. 서둘러 이해하기보다 잠시 멈춰 서서 문장을 따라가게 만든다.

이 시집을 읽는 경험은 어쩌면 나무 아래 서 있는 시간과 닮아 있다.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, 그 사이에서 조금씩 다른 감각이 열리는 순간들.

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말이 남고, 그 말을 오래 듣고 있던 존재만이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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